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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칼럼

2022년 4월 10일: 디지털 바벨론 시대에 무엇을 절제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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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on
댓글 0건 조회 6,947회 작성일 22-04-10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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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바벨론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는‘절제’가 없다. 폭발한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 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딤후 3:1-5). 


 필라델피아 출신 슈퍼 무비 스타 윌 스미스는 2022년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러 나 슈퍼 코미디 스타 크리스 록이 자기 아내에 대한 조롱조의 짙은 농담에 그만 ‘절제’의 끈을 놓 쳤다. 뺨 한 대 때렸다. 그 한 대 값으로 앞으로 10년간 아카데미 상 근처도 오지 못하게 되었다. 


  ‘절제’(self-control)란 ‘마디 절’(節)에 ‘자를 제’(制) 자다. 정도가 넘어가려 할 때 잘라버리는 것 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정도가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성품은 절제의 성품이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 시는 왕이여’라고 환호하였지만, 예수님은 왕에 걸맞은 백마를 타지 않으셨다. 나귀새끼를 타셨 다. ‘절제’하셨다 (슥9:9) 


  푸틴 같은 정복자는 백마 같은 탱크를 타고 미사일로 죽이고 점령하며 힘을 과시한다. 그런 정복자를 러시아인 80% 이상이 환호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복자가 아닌 공의와 사랑으로 나 같은 죄인을 찾아서 섬겨 살리기 위하여 겸손으로 백마 대신, 탱크 대신, 나귀의 새끼를 타셨 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제물은 멍에를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짐승의 새끼였다 (민 19:2, 신 21:3, 삼상 6:7). 예수님은 사람들의 환호에 반응하지 않으시고 종려 주일에 멍에를 져 본 적이 없는 나귀의 새끼를 타시고 하나님 앞에 ‘절제’로 자신을 하나님께 반응하여 드리셨다. 


  예루살렘은 해발도 높았지만, 수도였고 성전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예루살렘에‘올 라갔다.’ 예수님도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서 올라가셨다.’ 그러나 종려 주일에 예수님은 예루 살렘을 향하여 ‘앞장서서 내려가셨다’ 헨리 나우웬은 ‘올라가는 길’(upward mobility)에는 예수님 이 안 계신다고 했다. ‘내려가는 길’(downward mobility)에 가면 예수님을 만난다. ‘내려가는 길’ 은 ‘절제의 길’이다. 힘을 빼야 간다. 


  군중들은 환호하였지만, 예수님은 ‘절제’로 침묵하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 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 ‘고난주간’은 ‘절제’로 입을 다물어야 한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호성기 담임목사 Rev. 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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