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29일: 나는 호사가 인가? 실천가 인가? Am I a busybody? or a taciturn practitioner? > 안디옥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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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칼럼

2020년 11월 29일: 나는 호사가 인가? 실천가 인가? Am I a busybody? or a taciturn p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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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필라안디옥교회
댓글 0건 조회 11,812회 작성일 21-06-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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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가정, 교회, 직장, 사업장, 나라와 민족도 하나 될 수 있는 길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너
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예수님의 제자
들을 향한 예수님의 유언적인 기도도 사랑으로 ‘하나 됨’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
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가정이나 교회나 어느 공동체이건 ‘나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호사가’
(busybody)라 합니다. 실천은 없고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참견하고 험담하는 사람입니다. 건전
한 비판과 대안 제시는 성경적이고 민주적이고 꼭 필요한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은혜를 받
았음에도 불구하고 ‘선을 악으로 갚는 자’는 어느 공동체이건 하나 되게 하지 못하는 걸림돌 노릇
을 합니다. 이런 ‘호사가’의 행위는 ‘세상적, 정욕적 이며 마귀적’이라고 성경은 말씀 합니다 (약
3:15).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오늘도 받은 은혜만큼 ‘묵묵히 화평으로 하나 되게 하는 실천가’(taciturn practitioner)를 통하여
공동체는 든든히 하나 되어 세워지고 있습니다. 강도 만난 거의 죽게 버려진 유대인을 그가 원수
처럼 여겼던 사마리아인이 살렸습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하나가 되게 하는, 일어
나기 힘든 화평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원동력(driving force)은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 곧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
의 마음으로 살 줄 알았던 제사장, 레위인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까?’ 하는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바쁜 여정 중에서 ‘불쌍히 여
기는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습니다.
‘GIGO’란 말을 우리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garbage
in garbage out)’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이 들어가면 복음이 나온다(Gospel in Gospel out)’ 라고
부를 것입니다. 존재와 소용성의 가치가 없던 죄인인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을 베풀며 실천하는 ‘좋은 이웃이 되어 삽시다!’.
- 호성기 담임목사 Rev. 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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